건청궁
건청궁은 베이징 자금성 내정의 세 전각 중 가장 큽니다. 내정의 다른 건물처럼 자금성 북쪽 끝에 있습니다. 명나라 때는 황제의 거처였고, 청나라 때는 황제가 군기처와 함께 신하들을 접견하는 조회전으로 사용했습니다.

역사
자금성 대부분의 건물처럼 건청궁도 명나라(1368~1644) 영락제가 1420년에 세웠습니다. 명나라 때 황제의 거처로 사용했으며, 큰 건물은 2층에 방 아홉 개, 침상 27개로 이루어졌습니다. 황제는 잠자리를 감추기 위해 매일 밤 임의로 침상 하나를 골랐습니다. 이 관행은 청나라(1644~1912) 초기 두 황제 때까지 이어졌습니다.
명나라 황제들은 이곳에서 매일 국정도 논의했습니다. 외국 사절과 관리를 접견하고 문서를 읽거나 서명하는 일을 했습니다. 1722년과 1785년에 열린 천수연 같은 연회나 의례는 드물었습니다. 건륭제는 천수연에 여러 나라에서 온 60세 이상 남성들을 초대해 선물을 주었습니다.
옹정제는 황제가 살던 거처를 바꾸었습니다. 아버지가 60년 넘게 살았던 곳에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. 옹정제와 뒤이은 황제들은 궁 서쪽의 더 작은 양심전에서 지냈습니다.
청나라에서는 황제가 사망한 장소와 관계없이 추모 의례를 위해 시신을 며칠간 궁의 전각에 안치하는 전통도 따랐습니다. 의례가 끝나면 시신을 진산 언덕의 관덕전으로 옮긴 뒤 황릉에 매장했습니다.
건청궁의 흥미로운 유물 중 하나는 어좌가 놓인 높은 단입니다. 이 단에는 황제가 후계자를 지명한 문서가 보관되었습니다. 청나라 때 황제의 아들들이 왕위 계승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자, 현직 황제는 후계자를 비밀리에 정했습니다. 유언장에 이를 적어 두 부를 만들고 서로 다른 두 곳에 숨겼습니다. 하나는 어좌 아래 단 안에, 다른 하나는 황제가 항상 몸에 지녔습니다. 두 문서가 일치해야 후계자를 황제로 책봉할 수 있었습니다.
명·청 왕조 시기에 궁은 여러 차례 재건되었으며, 현재 건물은 1798년에 지은 것입니다.
청나라 (268년)
청나라 말기(1900~1912)에 여러 외국이 무력으로 중국의 문을 열려고 했습니다. 고궁은 국내외 세력의 약탈을 겪었습니다.
한 8개국 연합군 (영국, 미국, 프랑스, 독일, 러시아, 일본, 이탈리아, 오스트리아-헝가리) 자금성을 침략하고 약탈해, 황제가 베이징을 떠나도록 했습니다. 이후 궁궐의 많은 중국 보물이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.
건축
건청궁은 지어졌을 당시 내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으므로 내정의 궁궐 중 규모가 가장 큽니다. 높은 통로가 궁과 같은 이름의 문을 잇습니다. 어좌는 큰 단 위에 있고, 악령을 물리친다고 믿었던 향로와 긴 붉은 초, 커다란 거울이 둘러싸고 있습니다.
어좌 위에는 청나라 순치제가 쓴 편액이 걸려 있으며 “정대광명”이라고 적혀 있습니다. “의로움이 빛나게 하라” 또는 “정의와 광명”이라는 뜻입니다. 이 중국 성어는 일상적으로 “바르고 정직하며 도량이 넓다”, “숨기는 일이나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는다”는 의미로 쓰입니다. 역대 황제들이 지은 대련도 어좌 양쪽 기둥에 새겨져 어좌실을 장식했습니다.
궁의 좌우에는 작고 소박한 정자 두 채가 있습니다. 왼쪽 홍덕전은 명나라 때 황제를 만날 사람들이 기다리는 공간이었고, 청나라 때는 황실 사무실로 사용했습니다. 오른쪽 정자는 황제의 서고였습니다.
궁 앞 단 양쪽에는 청동 거북과 청동 학 조각상이 있습니다. 두 동물 조각은 왕조의 장수를 함께 상징하며, 왕조가 수천 대에 걸쳐 이어지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.
궁 동쪽 바깥에는 해시계와 고대 도량형 기구인 가량이 있습니다. 이 둘은 황제가 모든 백성을 공평하게 대하고 시간의 종속물이 아니라 천자로서 그 바깥에 서 있음을 나타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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